
First track
꿈은 꼭 소리를 내어 말할 것
w. 깡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는 것마저도 힘들 정도로 피곤함이 온몸에 꽉 들어찬 느낌이다. 이렇게까지 상태가 최악인 건 진짜 오랜만인데. 이건 뭐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는 건지, 나를 꽂는 건지. 몇 번에 흐느적거리는 헛손질 끝에 겨우 알맞게 열쇠를 꽂은 오토와는 이미 신경질을 내고 말고 할 기운마저도 전부 사라져 버린 뒤였기에 그저 힘없는 한숨과 함께 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뒤이어 들어오는 익숙한 온도, 익숙한 냄새, 익숙한 물건들의 배치가 더더욱 반갑게 느껴지는 것도 같다. 드디어 집이구나….
언제는 뭐 예고를 하고 터졌겠느냐마는, 하필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에 갑작스러운 변이종 사건이 터졌다. 오토와가 재직 중인 병원 인근의 한 아파트 단지를 감싸며 순식간에 뻗어나간 그 상도덕 없는 변이종은 자고 있던 사람들의 평온을 마구잡이로 깨부수기 시작했고, 기어이 대형 사건으로 분류될 정도의 큰 피해 규모로 번지고 나서야 겨우 수습이 되었다. 구조와 수습이 그렇게 느린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변이종은 이제 일상이라고 할 만큼 익숙한 것이었고, 그렇다는 건 대응 프로토콜도 잘 세워져 있다는 소리가 된다. 고작 삼십여 분. 새벽임을 참작한다면 생각보다는 빠른 수습이었으나, 그게 누군가의 세상을 망가뜨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라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아무튼 그런 일이 발생했으니, 나름대로 한가해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던 응급실에 초비상이 내려지는 것도 아주 당연한 수순이다. 이제 막 밤참을 챙겨 먹으려 간단한 샌드위치를 들고서 자리에 앉던 오늘의 야간 당직, 오토와는 앉자마자 사납게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한 입도 채 먹지 못하고 달려 나가 우르르 들어오는 환자들과 조우해야 했다.
응급실 당직은 여러모로 힘든 일이다. 계속해서 대기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그러했지만, 아무래도 응급실에 올 만한 사건들은 대개 큰 사건들이라.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되는 것도 부지기수다. 그러나 그것도 생판 처음에야 버겁지, 새벽의 오토와는 슬퍼할 새도 없이 골절에 힘겨워하는 사람, 관통을 당한 사람, 의식이 없는 사람, 작은 상처일뿐이니 괜찮다는 사람까지도 빠지지 않고 살피느라 정신없이 움직이기에 바빴다. 내가 잠깐 힘듦으로써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야 몇 번이고 버틸 수 있는 일이라지만, 역시나 문제는 모든 게 지나간 후에야 쏟아진다. 생각해 보면 그때 밤참을 먹지 못했으니, 새벽부터 지금까지 한 끼도 먹지 못하고 일만 한 상태기도 했다. 그러니 이렇게 힘이 없지. 게다가 아까부터 지끈지끈하다 싶긴 했는데, 살짝 만져본 이마가 뜨끈한 게 열까지도 나는 것도 같았다. 빨리 가서 자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어서 제 직장이 병원이란 것도 까먹고 바보같이 아픈 상태 그대로 그냥 집까지 와버린 것이다. 좀 이상하다 싶을 때 수액이라도 그냥 하나 맞고 올 걸.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신발을 벗고 반쯤 감긴 눈으로 비척비척 들어온 오토와는 씻는 것도 제쳐둔 채 풀썩,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외출복 그대로 침대에 뛰어드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늘만. 오늘만 그냥 눈 감고 잠부터 자자. 시트야 빨면 되잖아. 내가 먼저 죽겠다.
생각을 놓자, 오토와의 의식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참으로 단잠이었다. 이대로 깨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낄 만큼. 아, 그건 죽는 거니까 안 되지.
슈우는 오랜만에 알람 소리 없이 제 의지로만 눈을 떴다. 음… 보통 이러면 지각이던데. 옆에 놓인 협탁으로 손을 뻗어 알람 시계를 살피니 역시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잠을 잤다. 애초에 뭔가 잘못되어 알람이 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늦장 부리는 시간을 포기하고 준비를 하면 오늘의 외출 계획에 늦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잠을 설치느라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잠에 들었는데도 어떻게 수면 패턴이 맞았는지 몸이 평소보다도 개운하니 슈우는 그걸로 되었다고 애써 긍정적이게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누워있고 싶은 베짱이 기질까진 어쩔 수 없었기에 들고 있던 시계의 뒤편을 열어 이리저리 살폈다. 당연히 뭐가 문제인지는 잘 모른다. 한참 누워 시계를 괴롭히던 그는 애써 무시하고 있던 앞면의 시간을 흘긋 보았다. 이제는 정말 더 미룰 수 없는 시간이다. 하…. 결국 슈우는 준비를 위해 미적미적 침대를 짚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 음?
어쩌다 오토와의 집에서 임시로 지내게 되면서 오토와가 포기하고 제게 양보한 것은 이 잠자리, 침대였다. 싱글 침대를 쓰는 탓에 성인 남성 두 명이 쓰기에는 비좁을 거라는 이유로 집주인인 오토와가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네가 있는 동안 내 잠자리는 바닥, 슈우 너는 침대. 집주인이 먼저 그렇게 하라고 하였기에 당연히 바닥보다 침대가 편한 슈우는 굳이 마다하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그 잠자리 배분에는 변동이 없었다. 제가 알기론 그랬다.
“….”
내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같이 자기로 했던가? 아니면 내가 바닥으로 가겠다고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은 지금 제 곁에 누워서 자고 있는가. 일어나려던 것도 까먹고 팔을 받침대 삼아 옆으로 높게 누운 슈우는 천천히 눈만 굴려 옆에 누워있는 상대를 훑었다. 씻지도 않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고, 안경마저도 그대로 쓴 채라…. 당직 끝내고 오자마자 그대로 잠든 거겠군. 야간 당직이 피곤한 일이란 건 알았기에 그가 피곤에 절어 잠자리도 구분 못 하고 그저 습관처럼 침대에 누운 것이란 결론을 내리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슈우의 입장에선 딱히 뭐라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그럴 생각도 없고—한 명이 안 떨어진 게 용하다는 생각만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혹시나 그가 깨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자신은 당당하게 나가야겠다고. 어쨌든 침대는 나의 공간이고, 이 사태에 내 잘못은 없으니까.
“으….”
그렇게 결론짓고 멈춰놨던 외출 준비를 시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내내 조용하던 오토와 쪽에서 갑작스레 소리가 들려온 탓에 슈우는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웬 앓는 소리를 낸다 싶었더니, 그는 언제 곤히 자고 있었냐는 듯 얼굴까지 한껏 일그러뜨린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새 나쁜 꿈이라도 꾸는 건가. 혹시나 싶어 조심스레 짚어본 이마도 조금은 뜨끈했다. 애초에 몸 상태가 좋진 않았구나. 뒤늦게 알게 된 그의 상태에 슈우의 눈이 안쓰럽다는 듯 아래로 조금 휘어졌다. 알면서도 자신은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답답하게 다가온다. 오토와라면 자신이 아픈 걸 알면서도 일단은 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잤을 테고, 악몽은… 어쩌면 평생 고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당신과 나의 고질병이니 이건 정말 방도가 없다. 나의 악몽도 어떻게 하지 못해 이러고 있는데 남의 악몽이라고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슈우는 비릿하게 웃었다.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게 너무도 답답하다.
“….”
“….”
저도 모르게 이마에 올리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 걸까. 갑자기 오토와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내가 깨운 건가, 하는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잘못은 아니었기에 손을 거두지 않은 채로 그런 오토와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사태도 어쨌든 오토와가 만든 것이고 어떤 상황이든 그가 깨어났을 때 당당하게 마주하기로 했으니. 그래도 양심껏 아픈 사람이니 네가 먼저 내 침대에 올라온 거라느니, 네 잘못이라느니 하는 소리는 삼켜냈다.
그사이 힘겹게 두 눈을 다 뜬 오토와는 충혈된 눈이 불편한 듯 여러 번 끔뻑거리더니, 덥석 자신의 이마에 올려진 슈우의 손을 잡았다. 아, 거슬리면 치우겠…
“슈우.”
상대를 부르는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잔뜩 잠겨있었다. 슈우는 그의 부름에 고개만 끄덕여 반응해 주었다. 그러자 오토와는 말을 잇는 것 대신 그저 붙잡고만 있던 손 사이로 하나둘, 천천히 손가락을 단단히 옭아매기 시작했다. 마치, 놓기 싫은 걸 붙들듯이. 적어도 당사자인 슈우는 그렇게 느껴졌기에 굳이 쳐내지 않고, 그의 행동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손짓을 끝낸 오토와는 또다시 슈우,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슈우도 똑같이 목소리를 내주었다. 네, 왜 자꾸 부릅니까?
“그때…”
“네, 어떤 때 말입니까?”
“평생… 나와 함께 하겠다고…”
“….”
“나의 확신이 되어줘서… 정말 고마웠어….”
잠결에 웅얼거리는 게 꼭 방랑자 시절, 잠결의 어린아이를 달래던 것이 이와 비슷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을 참아내던 슈우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지며 무게를 더했다. 오토와가 말하는 그때는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는 데 일조하고 있는, 아마 지금 오토와가 악몽을 꾸는 데도 일조했을 사건이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굳이 서로에게 꺼내지 않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오토와를 붙드는 슈우의 손에 힘이 더욱 더해졌다.
“오토와 씨.”
“그리고… 그땐 내가 정황이 없어서… 말, 못 해줬는데…”
“오토와 씨, 이제 그만해도…”
“나도. 나도… 네게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야.”
“….”
“너의 불안도… 슬픔도 되지 않을게… 슈우. 꼭……”
“…….”
오토와는 제 할 말을 마치자마자 배터리가 방전된 로봇처럼 다시금 까무룩 잠에 들었다. 하. 슈우는 그제야 무거운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언제부터 참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거운 숨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쭉. …당신은 어째서 나를 한없이 망가뜨리고, 이리도 한없이 날 살게 하십니까. 살아갈 수밖에 없게 해. …젠장. 당신이란 정말…
“여전히 이기적인 거 알지?”
과거의 슈우도 오토와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엔 설움을 토했었던가. 아아, 화를 내고, 실망도 했다. 온갖 부정이 슈우를 감싸고도 남다 못해 흘러넘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슈우는 똑같은 오토와를 보며 웃었다. 이기적이란 말이, 그렇게도 우리를, 나를 힘들게 했던 단어가 한 번에 뒤집힐 수 있는 것도 그의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당신이 여전히 이기적이라서 나를 웃게 한다는 걸 그때의 내가 예측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걸 알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슈우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취중 진담도 아니고… 하하. 잠결에 이러는 법이 대체 어디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보십쇼. 지금 자는 척하는 거죠. 알면서도 괜스레 물은 말에 오토와는 답이 없었다. 고른 숨소리가 그의 대답을 대신할 뿐. 그렇게 푹 잠든 것을 확인한 슈우는 여전히 빈틈없이 맞잡힌 손을, 전보다는 평온해진 것 같아 보이는 상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오토와의 말들을 머릿속에 새겨냈다. 언제든 제 안에서 생생히 재생될 수 있도록.
이제 준비까지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대충 씻고 곧장 나간대도 늦을 가능성이 컸다. 뭐든 완벽하고 싶은 그였기에 지각을 하게 될 거란 사실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를 알면서도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오히려 작게 허밍까지 하며 침대에서 일어난 슈우는 어쩐지 평소보다도 아주 조금, 정말 조금 들떠 보이는 모습을 한 채 욕실로 들어섰다.
.
.
.
어느새 준비를 마친 슈우는 평소처럼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잠들어있는 오토와의 이마에는 아까까진 없었던 물수건이 올려져 있었고, 옆의 협탁에는 물컵과 알약이 놓여있었다. 늦었으면서도 오토와의 아픔이 염려된 슈우의 배려가 남겨낸 흔적이었다.
마지막으로 피아노까지 챙겨 어깨에 멘 그는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오토와를 한 번 살피다… 아, 다시금 발걸음을 돌려 책상으로 향했다. 어차피 이미 늦은 김에… 음… 여기 어딘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가 책상에서 열심히 찾아낸 것은 다름 아닌 작은 부착형 메모지 하나였다. 찾았다는 기쁨도 없이 곧장 펜까지 집어 든 그는 망설임 없이 슥슥, 글씨를 써 내려갔다.
길지 않게, 금방 써낸 메모지를 쥔 슈우는 발소리를 줄여 오토와의 옆, 정확히는 물컵과 알약이 놓인 협탁으로 향했다. 허리를 살짝 숙인 그는 알약 옆에 메모지를 꾹, 힘주어 붙여둔 후 미련 없이, 그 어느 때보다 후련하게 집을 나섰다
| 그 말 꼭 지키십쇼. 잠결이라 기억 안 난다고 하기만 해. 그리고 다녀오겠습니다. 나오. |
♬ https://youtu.be/13EWqjMqkiY?si=ofdZiOYItlIGOZox
bonus track
teneramente
w. 깡
피아노 연주법은 잊은 지 이미 오래다.
마스터했던 기타도 하도 오래된 탓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치고 있는데, 가끔씩 다뤘던 악기들이라고 다를까. …아마 계속했다면 모든 악기를 다 마스터하고도 남았겠지.
이제는 기타 하나로도 벅차 다른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놓아주는 게 더 빠르겠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늘 피아노도 기타만큼 다시 제대로 연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왜 하필 피아노냐고 묻는다면… 이건 슈우가 사랑하는 악기니까. 왠지 나도 똑같이 다뤄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랄까. 모르겠다. 그냥 이 또한 속죄라 치자.
주인 없이 홀로 펼쳐져 있는 건반을 가만히 노려보다 거기까지 생각이 뻗친 나오는 결국 자연스레 건반에 손을 올리고는 기억을 더듬어 둥그렇게 말기 시작했다. 손바닥 안에… 달걀 하나를 쥐고 있듯이…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기에 완벽한 자세부터 만들어 칠 준비를 마친 그는 그제야 도 건반 위에 올려진 엄지에 서서히 힘을 주었다. 잊고 있었던 딱딱하면서도 부드럽게 쑥 들어가 울림을 주는 건반의 감각이 손가락을 타고 온몸에 퍼지자,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니 다음은 망설임이 없다. 검지로 레. 중지로 미. 다시 엄지로 파를 누르고, 검지로 솔. 중지로 라. 약지로 시. 소지로 도. 연주라고 하기엔 그저 음계를 읊을 뿐이었지만, 물 흐르듯 올라가는 안정적이고 편안한 음정의 흐름이 작은 방안에 몇 번이고 울려 퍼졌다.
“나오. 이제 제 자리를 노리기라도 하는 겁니까? 안타깝게도 사람 손은 두 개라 기타와 피아노를 동시에 치진 못하는데… 아, 피아노를 발로 친다면 혼자서도 버스킹을 할 순 있겠네요.”
“…!”
갑작스러운 음성에 딱히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도 적잖이 놀란 나오가 건반에서 손을 떼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르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새하얀 샤워가운 차림의 슈우가 벽에 팔짱을 끼고 기댄 채로 삐뚜름하게 서 있었다. 어딘가 비꼬듯 말함에도 그건 그저 슈우의 천성이자 재능일 뿐, 나오의 행동이 불편하다거나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까진 전혀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그것보다는 오히려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흥미를 보이는 얼굴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더 쳐도 됩니다. 내가 당신의 관객이 되어줄 테니 마음껏.”
“…됐어. 그냥 보이길래 한 번 눌러본 거야. 그리고 재미없이 음계만 겨우 읊을 뿐인 걸 뭘 듣는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금 돌아앉은 나오는 쉽게 피아노 곁을 떠나지 못했다. 애매하게 건반 끝에 걸린 검지는 미련의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부러 힘을 주지 않았다.
흐음. 여전히 뒤에서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슈우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나오는 이제 무엇이든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려는 노력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러고 싶어 했다. 근데 지금은 왜 또 지레 회피부터 하려는 듯한 기색을 보일까. 아, 역시 습관은 무섭다는 건가. 슈우는 지금의 발언을 딱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저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그리고 그에게 있어 납득되지 않는 것은…
“자아, 그럼 제가 약간의 도움을 드리죠.”
“어….”
절대 따르지 않는다.
긴 다리로 순식간에 나오의 바로 등 뒤까지 온 슈우가 상체를 한껏 숙이며 나오의 양손을 건반 위로 확실히 잡아끌었다. 갑작스럽게 오른쪽 얼굴 아주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체온과 숨결. 반사적으로 몸이 움찔했지만, 그보다 나오는 다시금 건반에 올려지길 허락받은 제 두 손에, 아니 따지면 네 개의 손에 눈길을 주기 바빴다. 저도 기타를 치는 데 무리가 없을 만큼의 손은 되는 편이었지만, 제 손을 다 덮으며 함께 올려진 슈우의 희고 고운 손은 ‘역시 피아니스트의 손’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건반 위에 있을 때 가장 완벽해 보였기에.
으음…. 제 손에 대한 상대의 감상이 어떻든, 나오의 손을 쥐고 잠시 고민하던 슈우는 나오의 오른쪽 손가락만을 이용해 천천히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도도솔솔라라솔. 음? 파파미미레레도.
“아니, 아니. 잠깐만. 이건 작은 별이잖아. 이 정도는 나 혼자도 칠 줄 알아.”
“아, 그렇습니까?”
전혀 몰랐다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에는 미세한 웃음이 묻어있었다. 역시 그는 잘 알면서도 일부러 가장 기본이 되는 쉬운 곡을 누른 듯했다. 숨길 생각도 없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슈우는 상대의 귓가에서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럼 이건? 미레도레미미미레레레미미미. 그렇지, 작은 별 다음으로는 비행기가 나와줘야지. 나오는 무어라 더 말하려다 관두고는 가만히 그의 손길에 제 손을 맡겼다. 똑같은 음을 한 번 더 치다가 마지막엔 약간의 변주로 끝나는 비행기의 짧은 악보가 결국 끝까지 연주되었다. 슈우는 어떻냐는 듯 고개를 돌려 나오를 내려다보았고, 나오 또한 고개를 돌려 슈우를 올려다보았다. …봐, 저런 진지한 얼굴로 답지 않게 장난을 치려 드니 괜히 더 뭐라 할 수가 없어지는 거야.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한 나오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그가 쳤던 대로 건반이나 누르기 시작했다. 미레도레… 그러자 이번엔 왼손이 눌리며 그에 맞는 코드 반주가 더해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계속하십쇼, 오른손’하는. 마치 피아노 학원 선생님 같은 태도를 보이는 녀석에 나오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을 계속 움직였다. 그런 제 움직임을 타고 여전히 위에 얹어져있는 손이 멋대로 움직이는 왼손과는 다르게 순순히 딸려왔다. 이제야 제법 제대로 된 음악 같아진 비행기 연주는 그 상태로 마지막까지 쭉 이어졌다.
“아… 역시 불편하네.”
간단한 코드래도 여러 손가락을 동시에 써야 하는 일을 남의 손을 빌려 하자니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왼손으로 코드를 몇 번 더 힘겹게 잡던 슈우는 쯧, 소리를 내며 자신의 손을 나오의 손 아래 동굴처럼 만들어진 공간으로 꾹꾹 비집어 넣기 시작했다. 그를 본 나오는 금방 눈치를 채고 건반에서 손을 떼 그가 들어올 공간을 더 넓혀주었다.
“나오. 아까의 저처럼 제 손 위로 당신의 손을 감싸듯이 올리십쇼.”
“…이것도 네가 치는 데엔 결국 불편하지 않겠어?”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은 당신을 알려주는 게 목적이니까.”
그러면서도 저 역시 조금은 편해진 손이 마음에 드는지 이름 모를 곡을 연주하며 가볍게 손을 풀어가는 슈우였다. 나오는 잠시 고민하다 연주 중인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유연한 손가락의 움직임이 그대로 나오의 손에 와닿아 그를 움직이게 했다. 마치 이 모든 걸 제가 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만 같게. ……기분 좋아.
슬슬 손이 다 풀린 듯한 슈우는 마무리로 엄지와 중지, 소지로 딩, 띵, 건반을 두 번 누르는 행위를 통해 연주의 끝을 경쾌하게 알린 뒤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번엔 어떤 곡을 알려드릴까요. 음… <Stille Nacht, heilige Nacht>도 느린 템포라 초반에 배우기엔 쉬운 곡이겠네요.”
“아니, 그거 말고…”
“따로 원하는 곡이 있습니까?”
할말을 고르느라 손에 힘이 들어가자, 나오의 오른쪽 검지에 의해 마디가 눌린 슈우의 오른쪽 검지가 건반을 살포시 눌렀다. 딩— 울리는 소리와 함께 나오가 슈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네가 치고 싶은 곡. 그냥 그걸 쳐줘. 난 여기서 네 잘난 움직임을… 음… 어떻게 학습해 볼 테니까. 연주란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쇼맨십도 어느 정도 필요한 영역이잖아. 넌 그걸 제법 잘하는 편이고.”
사실은 그저 슈우의 듣기 좋은 연주를 계속 듣고 싶었을 뿐이지만.
“…좋습니다. 프로의 피아노 연주란 어떤 건지 확실히 와닿게 해드리죠.”
이번엔 납득이 가는 이유였기에 슈우도 쉽게 순응했다.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는 듯, 그는 샤워가운의 팔 부분을 살짝 걷은 채 아까보다 피아노 쪽으로 좀 더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 나오와 한뼘 더 가까워진 그는 마음을 정돈하듯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 나오도 괜히 그의 손 위에서 꿈지럭거리며 방해하지 않도록 힘을 주욱 풀었다. 하겠습니다. 이전처럼 귓가에 읊조린 그가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맑은 하늘 위로 해가 가장 높게 떠 있어 온통 밝은 휴일 점심의 한구석에서 듣기 알맞은, 통통 튀는 경쾌한 멜로디가 흘렀다. 반칙 같은 선곡에 나오의 입꼬리가 절로 씰룩, 움직였다. 꼬리뼈 끝에서부터 얕은 전율이 흘렀다.
건반 위의 손가락은 연주가 시작된 만큼 정말 쉼 없이 움직여댔다. 통통 튀는 멜로디에 걸맞게 그의 손이 건반에서 여러 번 튀어 오르기도 했기에 나오의 손도 속절없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튀어 올랐다, 내려갔다, 옆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였다가, 손가락끼리 파도를 타는 모습까지 연달아 보고 있으니 꼭 손가락끼리 탱고라도 추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신기하고, 조금은 우스웠다. 그래도 가히 매료되지 않을 수는 없는 가벼운 놀림이다. 얘는 내 손이 무겁지도 않나….
그러나 딴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려고 하면, 집중하라고 하듯 귀신같이 멜로디가 변주되어 다시금 시선을 끌었다. 그러면 나오는 순식간에 피아노 속으로 잡혀들어가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슈우의 덜 말린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제 볼을 적시며 떨어지는 것도, 어깨가 점점 축축하게 젖어가고 있는 것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물론, 그건 슈우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공간엔 오로지 피아노와 선율과 저들뿐이었다.
음악은 두 사람에게 늘 그런 것이 되어준다. 어떤 불안도, 슬픔도, 근심도… 그 외 나를 갉아먹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나를 떨어뜨려 주는 마법 같은 것. 그렇기에 아무리 멀어지려고 해도 멀어질 수 없어 되찾고야 마는 삶의 이유, 꿈과 이상….
속도와 볼륨을 줄여가며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던 건반 위의 춤사위가 서서히 끝나간다. 이번엔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담백하게 끝낸 그의 손이 가지런히 건반 위로 내려앉았다. 움직임이 멈추어도 여전히 건반을 누를 때마다 움직이던 손의 감각이 생생해 나오는 괜히 슈우의 손가락 위에서 작게 꿈지럭거렸다. 후. 슈우도 여태껏 참아왔던 밭은 숨을 내뱉었다. 개운한 기분이 듦과 동시에 두 사람의 고개가 서로를 향해 또 한 번 돌아간다. 이번엔 좀 더 진득하게 마주하는 시선 속에서, 이 순간의 두 사람은 아마도 같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음악을 만나, 너를 만나 다행이다.
맞닿은 손이 본능적으로 서로를 향해 조금 더 얽혀간다.
아, 그렇지.
“슈우. 내 곁에서 계속 피아노를 쳐줘서 고마워.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제 곁에서 언제나 연주를 들어주니 저야 말로요. 그것도 저 또한 그렇고요.”
대답을 한 슈우는 시계를 한 번 보더니 나오가 앉아 있는 좁은 피아노 의자로 엉덩이를 들이밀고 앉았다. 나가기까지 시간이 아직 남는 듯한데 한 곡 더 듣겠습니까? 그에 나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 기타를 거치해 둔 곳으로 향했다. 아니, 나도 기타 꺼낼래. 당장 합주가 하고 싶어졌어. 슈우도 다시 한 번 손목을 풀었다. 좋습니다. 얼마든지.
열린 창밖으로 피아노와 기타가 만들어낸 하모니가 몇 분이고 끊임없이 흘렀다.
잊지 말고 꿈은 꼭 소리를 내어 말하자.
내 전부를 내놓아서라도 간절히 붙잡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 https://youtu.be/1ecCNGBwRD4?si=iVptsvqJaYWJUjc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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